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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별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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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한이웃moonsaem 2024. 7. 25.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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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음소식을 듣는데마음이 먹먹해진다. 70년대부터 양희은 , 박인희씨와 함께 그다지 찬란하게 날 준비를못하고 있던  서러운 내 청춘을 달래주던 노래를 불러주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떠나다니... 김민기씨의 별세 소식에 갑자기 마음이 무겁다. 민중 가수라 불리던 김민기씨는 ‘내 나라 내 겨레’와 ‘아침 이슬’, ‘상록수’ 등을 작사∙작곡하고 노래하며  암울한 시대를 노래로 저항하던 민중 가수였다.  그가 지난 21일 지병인 위암 증세가 악화돼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그의 의 발인식이 7월 2 3일오전 그의 8시 빈소가 마련됐던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되고있었다.

 

발인식이 끝나고 고 김민기는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꿈밭극장 마당을 들러서 그의  장지인 천안공원묘원에 향하기 시작했다.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사람드이 뒤따르는 행렬은 아르코 꿈밭극장으로 향했다. 아르코꿈밭 극장은 고김민기씨가 인이 33년간 일궈온 '학전'이 폐관된 후 새롭게 연 극장이다. 고인은  1990년대에 이미 극단 학전을 창단했으며  학전블루(2024년 폐관)와 학전그린(2013년 폐관) 소극장을 함께 운영해 왔다.  이곳들은 '김광석 콘서트',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등 라이브 콘서트 문화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으며 연극, 대중음악, 클래식, 국악,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소극장 문화를 일궈왔다.학전은 재정 악화와 고인의 건강 악화로 지난 3월 개관 33년 만에 문을  닫았다가 지난 17일 어린이·청소년 중심 공연장 아르코꿈밭극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고인은 1971년 '아침이슬'이 담긴 자신의 첫 앨범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곡이 창작 김민기씨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불리기 시작했고 결국 김민기씨는 유신 정권의 표적이 됐다. 민기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노래를 발표할 수 없게 되자 노동 현장에서 묵묵히 곡을 쓰고 저항성이 강한 노래극을 만들며 끊임없이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991년 학전을 연 뒤 '지하철 1호선' 등 뮤지컬과 어린이극, 콘서트 등을 연출하며 수많은 가수, 배우들이 성장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늘 이들을 '앞것'이라 부르고 자신은 '뒷것'이라 불렀다고 한다.

 

1973년 김민기씨는  지금의 목동인 신정동에서 야학을 시작했다. 야학은 돈이 없어 학교에 다닐 수 없거나, 가난한 환경 속에서 가족을 위해 생계를 짊어져야하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시작했다 즉, 낮에는 공장에 다녀서 밤에 공부해야 하는 청소년을 위한 배움터였던 것이다. 김민기는 불우한 환경 속의 청소년들에게  국가 대신 대학생들이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최근 방영된 김민기 다큐멘터리에선 이제는 60대 후반이 된 그때 ‘신정 야학’ 교사들이 모여 김민기를 기억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김민기씨를 사랑이 많은 따뜻한 사람이었다라고 추억 했다.이들 중 알만한 사람들은  김준규 전 검찰총장, 이인용 전 삼성전자 사장, 김한 전 JB금융지주 회장이었다.

 

김민기씨가 야학을 운영할 당시 일화가 있다. 당시 학생용 영어 교재에 대한 표현에 문제가 있다며 논의를 제기 했었다고 한다.  ‘나는 노동자, 너는 자본가(I’m a laborer, You are a owner)’라는 문구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슨 사상 주입을 하려고, 정치적인 교육을 하려고 이런 야학을 하는 게 아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저항 가수’ 김민기씨는  “과격한 운동권 같지만 사실은 순수한 사람 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아침이슬' '꽃 피우는 아이' '봉우리' '내나라 내겨레' 등의 곡을 발표하며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노래로 1970년대와 1980년대 어두운 시대에 저항하며 노래로 청년 문화를 이끌던 진정한 민중운동가  김민기 가수의  노래는 암울한 시대에 많은 의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을 다독이며 위로했다.  그의 노래를 듣고,분노를 삭이며  스스로를 위로했고,시대에 저항하고 싶은 불같이 타오르는 마음을 가다듬고 때를 기다리며 그랬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 '아침이슬' 음반 한 장이 고인의 유일한 정규 앨범으로 남아서 아쉽다.

 

운구차가 극장에 도착했다. 고인의  유족들은 마당  화단에 영정을 놓고 묵념을 했다. 붉은 벽돌로 울타리가 만들어진 화단에는 고인이된 김민기씨를 기리며 시민들이 놓고 간 꽃과 막걸리, 맥주, 소주 등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고인의 대표곡 ‘아침이슬’을 부르기 시작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추모객들은 눈물을 훔치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이어  하늘도 거센 비를 뿌리기 시작하고, 운구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추모객들은 고인이 돼버린 민중가수 김민기씨를 눈물로 배웅했다. 

 

 고인이 생전에 기획자로, 연출가로 있었던 극장 마당에서는 고인과 인연이 깊은 배우 설경구와 황정민, 장현성, 최덕문, 가수 박학기 등 학전 출신과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등 지인을 비롯해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등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과 시민들이 미리 와서 고인을 맞았다. 학전은  한국 문화계에 많은 거목들을 학전과 함께 시대에 대한 고찰과 의식을 깨우고 실력을 쌓아성장한  많은 가수와 연극인, 텔렌트들이 김민기씨의 죽음에 대해 너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특히 고인이 연출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출신의 배우 장현성과 설경구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군중들 일부는 “선생님 사랑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외쳤다. 색소포니스트 이인권씨가 김민기의 곡 ‘아름다운 사람’을 연주하자 주위는 다시 울음바다가 됐다. 이씨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당신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외침이 거센 빗소리를 뚫고 그 곳에 계신 고인에게 들렸기를 바란다.  야학 후배였던 이인용은 이렇게 기억했다. “민기 형은 저항의 상징처럼 돼 있지만, 아마 조금 더 좋은 세상,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을 생각했던 것 같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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